주먹구구 셈법은 얼마나 믿어야 하나 
카푸친 씨는 고성능 컴퓨터와 같은 계산능력을 가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아니다. 그런 카푸친 씨가 정글경제를 살아가는 데 휴리스틱은 매우 유용한 의사결정 방식일 수 있다. 정글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젤 무리는 사자의 기척만 느껴도 이리저리 따져보지 않고 일단 뛰고 본다. 차분하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겨를이 없다. 직관과 주먹구구로 신속한 판단을 내리는 휴리스틱은 인간의 중요한 생존본능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휴리스틱은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 주먹구구의 한계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카푸친 씨는 자신의 주먹구구 셈법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과신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보이는 만큼, 들리는 만큼. 
그렇다면 
생각이 많아 틀 속에 콕 갇히던지, 
생각없어 틀조차 못느끼던지.
결국 저도 모르게 죽어가나보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그 무언가 그림자를 바라보고.
경우에 따라 스스로 그 맹신 정도에 따라
뜻없는 말을 자신있게 하나보다.
힘들다 힘들어.

이제 말을 아끼고 행동을 보일때.
다만 얄팍알량한 자신만이 유일한 기준 아니기를.
목적을 위해 큰 맘 쓰기를.

상상해본다. 
낯선 외계행성에서 
가능성 알길 없는 인류를 찾아 나설지.
아님 오늘 하루라도 그들 언어를 익힐지.
딱 그정도가 나의 지금 틀인가싶다.
틀인가싶은거보니 아닌가보다.

사람이 그리운건지 대화가 그리운건지
때론 그렇고 때론 저렇다.
차라리 말이라도 하는게.
차라리 틀에 박힌 말이라도.

발아.

씨앗이라 말씀 드렸다.
쭉 듣던 그 분이 내 입을 통해 입을 여신다.
아냐 씨앗이라기보단 바이러스다.


그래 난 지금 침투작전을 준비중인
침투조 비밀요원이다.

이렇게 느린 속도로 허나 쥐도 새도 모르게
뭉근한 침투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씨앗을 심던 내가
이제 바이러스 침투를 진두지휘하려 한다.


뭔일인지 보이는 것만 보이고
들리는 것만 들린다 불평했었다.
차라리 눈먼 벙어리라면 했었다.


침투를 생각하니
그리 보이는 것 불행하지만은 않다.
그리 조잘대던 그 잡소리 거슬리지만은 않다.
그게 다 내가 이리 이리 흐르도록 한 비료겠지. 똥비료.


이제 난 바이러스를 품은 보균자.


다행이다. 하마터면 놓아버릴뻔 했어.


모든 인연과 우연에 이토록 맘 담아 감사한 적 드물었는데.
그 분은 학교도 일도 쓰잘데기 필요없다 하셨지만
결국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만나게 되는 싹이었음 느낀다.


너무나 극단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무서운 미래지만 너무도 당장 신이나는.

맘에 심은 씨앗이 오늘 예기치 않게 발아했다.


징소리가
은은하게 한번
강하게 또 한번
출동. 
손수 징을 쳐 알리셨다.

추운 겨울 우이동 낡은 폐가
도란도란 재미나게 낄낄낄 맘을 비웠다
맥심커피 귤까먹고 호두 유과 노나먹었다
쥐도 새도 아무도 모르게 
내 맘 두터운 껍질이 샬샬샬 녹았다.

대체 얼마만이냐.
대체 왜 이제서야.

뜨겁다. 
따듯하다.

/


게릴라와 같은 시작은 일단 포석이 되겠다.
반복이 주는 힘으로 천진난만한 상태가 되겠다.
뜻이 있으므로 반복을 택하겠다.
1년은 그렇게 세균전의 시발이 되겠다.

기호라 생각이 든다면.

내가 낯선 도시에서 그들의 행위 - 그들 스스로에겐 익숙한 행위 - 그 자체를 지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학습의 정도 차이 때문이다. 대상이나 상황의 자극(혹은 시그널, 기호)가 전달 되었을때 그 사회적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혹은 그 사회 구성원의 도움없이는, 나 스스로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그것을 해독해야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대중은 오롯이 어제와 같은 삶을 내일도 누리기 위해서, 어제의 삶보다 너무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발전, 그 흔들리지 않는 현실을 위해 적응과 사회화는 대중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수많은 시그널과 사회 구성원으로서(혹은 구성원으로써) 처리해야할 정보와 임무가 매일 대중에게 전달된다.
그런 와중 잠시 어제와 다른 형태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절대적인 시간을 요하는 과정으로, 그의 피로를 유발하는 위험한 행위가 된다. 

본능적으로 도전은 꽉 짜여진 현실안에서 그 현실을 더욱 공고히 하지 않는다면 피하게 마련이다. 대중에게 도전이란 이 현실을 더욱 더 굳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할 뿐, 이 현실의 그 이면,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 현실을 달리 보라 강요한다면 그것은 무자비한 독재와 오만으로 인식될 뿐이다. 보다 온건하고 장기적인 자극으로 그 변화를 스스로 일으켰다 여기도록 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이 심한 요즘의 대중을 진심으로 도전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산재해 있는,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익숙해 그 자극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처리 되고 있는 소재를 파악한다. 그 소재가 지닌 사회적 의미 속에 정서적인, 개인적인 의미를 심는다. 그리고 한번의 강한 충격 - 추억 - 을 가한다. 세월이 흐른다. 일상 속에서 그 소재에 드믄 드믄 노출이 되며 강한 충격은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질 즈음 그 스스로는 그 소재에 대한 개인적 의미와 시각을 갖게 됨다. 이제 사회적인 의미의 기호는 좀 더 틈을 지닌 시그널을 더하게 된다.

일상을 이제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957&category_type=series

그러니까 내말은.

어.
그러니깐.
니 무어냐고.
연기력이 날로 늘어가.

사파리 한판 더?

사파리투어.

있잖아 내 친구 얘긴데,


하며 운을 띄우면 나도 솔깃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어느새 그런 얘긴 듣기 싫어져 버린다.
듣기 싫어졌다기보단...


솔깃하지만 듣기 싫은 얘기.


결국 이 나와의 대화를 위해 너와 나 함께 나누는 이 시간에
누군가의 삶을 시시덕, 혹은 - 때론 분위기상 - 진지하게 끄집어다
썩썩 썰어먹는다.


자기 얘긴 아니지만 친구 얘기라는 그 얘기.
어쩐지 기쁘다면 웃어주면 되고
다행히 안됐다면 얼굴을 굳히면 된다.


달라지는 현실없이


그냥 그렇게 또
또 그렇게 나를
나의 위치를 내 모습을 또 다시
확인한다.


사냥하는 사냥꾼들.


내 얘기, 내 삶도 언젠가 너와 너의 누군가와 함께
500짜리 맥주로 꿀떡꿀떡 넘어가겠구나.
혹, 그 얘기가 너의 멋진 의미에 아름다운 근거를 주겠구나.
난 이렇게 멋진 얘기를 낚아 올랐다며


그 의미도 모른채 
느끼지 못한 그 삶을 대가리로 
망설임없이 써나간다.


듣다보면 내가 싫어진다. 말하다보니 할 말이 없다.


화자가 바라보는 세상에 화자는 없다. 
세상을 낚느라 정작 내가 누군지 잊었다.
뭔가를 말하는 의미심장함에 텅빈 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정신이 없다. 낚아 올리느라. 기록하고 기억하느라.
이 순간을, 이 장면을 담느라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 틈이 없다.
그냥 뭐 멋지느라 바쁘다.


이렇게 나의 일상은 또 어디선가 짜여진 틀로 창작되어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로하겠지.


사냥하는 사냥꾼.


있잖아 내 친구 얘긴데,
하며 운을 띄우면 나도 솔깃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만다.


차라리 사파리를 하지 그래.


철갑을 두른 사파리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본다.
호소력 깊은 눈빛 연기로, 그 쓸데없이 예리한 눈으로 바라본 타인의 삶.
니 삶, 어디 여행기나 적다 끝날라.


투어리스트.

본질과 목적. 수단과 욕망.

신비로운 몇가지.

그 목적이 무언지에 따라 본질을 선택하는 경우.
이기적 욕망으로, 본능적인 자기방어.
그래서 알든 모르든 스스로를 기만할 경우.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 나머지 의미를 잃을 경우.
스스로의 오류에 대해 생각을 잃을 경우.

흔히 목적은 그럴듯하며, 행위는 사라진다.
본질은 선택이 되어 훌훌 날린다.
기회주의는 자라난다. 자각하지 못한채 싹이 튼다.
돌이켜 보면.

생각이 생각으로 그친다면 항상 기회주의와 위선의 틈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는건지도 모르겠다.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쉽겠지만. 그리 쉽지 않으니. 단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그 목적을 위한 최선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위선을 떨쳐버리기 위해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잡기 위해 큰 목적은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것. 그것에 그야말로 의미를 두고 끝을 맞이한다. 어디서 흘러들어온지 알 길 없는 그럴듯한 의미로 감싼다. 이렇게 본질은 가려지고 희한한 논리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목적은 수단으로 지워진다. 찾아가는 길이었다 말한다. 깊은 속 알길 없는 너와 나의 욕망으로. 뜨끔 뜨끔 뭔가 알겠다 싶을 땐 이미 늦었다. 이미 굳어진 이미지에 실은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말한다면 그 삶이 뭐가 되겠어. 그냥 그렇게 살다 가면 되겠다 싶은 맘으로. 욕망에 의해 지워진 목적은 본질이 슬쩍 뒤바뀐채 저잣거리에서 우상이 되어 나뒹군다.

행동은 온데 간데 없고, 말들이 날뛴다.
행동이 설령 온다한들, 그 목적은 본질이 아닌 자기 만족일 뿐.
부여잡은 행동은 그 목적이 본질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다만 스스로 알 길 있다면.
근데 그게 불가능한게, 알았다면 그렇지 않겠지.
단지 존재는 타인의 시선에 구속되어 발을 동동 구르니.

행위없는 공허한 말들이나.
본질잃은 알량한 행위들이나.
정도의 차이. 그냥 다 그랬구나.
부끄럽게 얼굴이 타오르는 밤.
폼나게 색안경을 끼고 밤길 어둡다 칭얼거린다.

내일은 또 누굴 만나 씨앗을 뿌리나.
주렁주렁 달린 탐스런 거짓부렁.
뻥치시네 소리에 놀라 움찔 보니
코에 난 구멍에 손을 후벼박고 꼬맹이가
내쪽으로 온다.
싶더니 휙 지나쳐 저리 간다.

드러워죽겠어.
엄만 너도 저랬다며
키워봐야 저 맘 안다 했다.

aurora.


kind of a pain killer /

for people who want something proof from the world.

aurora.

11/09/2010

aurora.


01/09/2010

aurora.


01/09/2010

aurora.


27/08/2010

aurora.


21/08/2010

aurora.



20/08/2010

aurora.


20/08/2010

aurora.

20/08/2010

aurora.


20/08/2010

aurora.

18/08/2010

aurora.


17/08/2010

aurora.

12/08/2010

aurora.

02/08/2010

aurora.

15/08/10 - after the rain.

aurora.

15/08/10 - in the rain.

aurora.

15/08/10 - before the rain.

aurora.

12/08/10

aurora.

15/08/10

만들어진 기억.

만들어진 기억.
만들어진 과거.

진실 그대로의 무언가가 있을 수 있는지.
관점에 의해 살아가는 너와 내가 어느 다른 시선을
스스로 느낄 수 있기까지.

해석만이 남아 있는 현재에
오류의 가능성을 심어본다.

훗날 얼굴이 붉어질까봐.
이미 늦었다 싶어도 알건 알아야.

bolte bridge를 바라보며.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이 흘렀다.

false monument 를 고민하던 중,
false grand tour 로 생각이 흐른다.

false monument는
존재감이 희미한 것일 경우,
사라진다 한들 그 차이를 아는지.
그것을 방해하거나 유도하는 원인은 무언지.

false grand tour는
시각의 제한과 그 능력의 증폭을 가하여
공간을 다르게 인식한다.



인식과 관점, 태도에 대한 접근.
일상을 마주하는 감각이 풍성해지길.

대가리수 늘리려다.

열심히. 열심히 열심히. 이것 저것 경험삼아 이짓 저짓. 구리다 싶은건
피하고. 멋진 판단력. 핑핑 가려가며. 고를데로 고르다가. 죽는건.


/
말은 생긴데로 산다하지만
있는데로 사는 사람은 태어나 보질 못했다.
하나 같이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 그러려니 하며 하루가 간다.
동화에나 나올듯이 드라마 속편처럼
내일은 더 나을것이라는 희망으로
내일은 내 주변이 바뀔듯한 기대로
까만 밤 눈을 깜빡깜빡 감고 

으드드드 

뜬다.

치카치카치카.
지이이이이잉 - 얼마전 전동칫솔로 바꿨다.

얼마나 더 많은 새짓거리를 해야 하겠니.
그래 생각을 해보자. 
가마있어보자-
무얼 바꿀 수 있을까.
죽음에 이를때 둘러싸일 인간들의 종류따위.

가마있어보자아-

가마 있어보다보면은 당췌 뭐할라고 눈을 떴는지 기억이
간질간질 날듯 안날듯 당췌 안나.
지이이이이이잉
가마보자아아아아아앙

/
새 연필. 새 가방. 새 책상. 
새 기분. 새 신분. 새 작업. 
새 업적. 새 찬사. 새 새새.

그 녀석들 뭐하지 싶다가.

새 무덤.
이햐- 못보던 친구들 많이 늘었다.
많이도 갈아치웠네. 역시 야무지네.
죽는동안 죽는다고 수고 마이했다. 


인제는 뭐.
뭐할래? 뭐하까.
여부세요?
왜 말이 없나.
디졌나.

/
최악인데.

living.

smokers - non smokers
drivers - pedestrians
sellers - buyers
artists - audiences


developer - public
public - homeless


politicians - ?

you - bad

whatever.
we're still living
still living in
your my world.

낀 때.

너와 나의

눈에.

나의

손에.

저게 보이지 않느냐고 다그쳐
봐야 달라지는게 뭐.

내 손에 때 낀 내 탓인가보다 한다.

그러다

한숨을 쉬다
웃다 쉬다 그러다
멍하게 웃다
쉬고 보다
그러다가

가만보니

가만보니 뭐 낀줄 알던 그건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거였어.

그렇담

그동안
그 낀 때 요러네 조러네

그 한 때 이러쿵 저러쿵
속 닥 속 닥 
질 근 질 근

뭘까.

뭐니.
뭐냐.
너와 나.

훗날.

지금 이 순간들이
훗날 말해지길
그때.

그때 그 순간들이
지금 말하여지길.

알길없던 저 순간들이
지금 바라보면 훗날로.

내가 말하는데로
내가 행하고
내가 행하는데로
네가 말하고
네가 말하는데로
내가 행하는

끊임없는 흔들림과 반복 속에서
차곡차곡 훗날은 이렇게
바라는데로 행하는데로
기록이 되고 있다.

네가 믿는데로
되리라는 것

바라보는데로.

너 바라는데로
보이고,
들리고,
그렇게 너 행하고.

그 행함이 기록이 될 뿐.

원래 너와 내가 어떻하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그저 힘없는 투정처럼 허무함에 또 다시 꿈을 꾸게 한다.

네가 그렇다면
네 훗날은 그럴것이고

네 욕구와 의지에 이끌린 훗날.

그 훗날은
그것 봐라 그렇지 않느냐는
안심을 가져다 주며
일련의 불씨로 남아 있던 찜찜함을
-훅
꺼뜨린다.

하지만
원래 너와 내가 어땠는지
그때에도 훗날에도
그 훗날의 그때에도
알길이 없다.

찜찜함이 뭘 말하려는건지

어떤 확신의 불길 속에서
뒤집힌 눈으로
어느 귀를 습하게 하고 있는지

어색한 몸짓과 언어가 멋스럽고.
시끄럽기만한 지금.

어느 믿음과 의지를 향해
욕망을 삼킨 너와 내가 죽어가는지.

being - what if.

Nothingness.

In order to be rememberable one
today I shake hands like
yesterdays.

In order to be irreplaceable one
today I say something...
something make sense.
always.

...

In order to be remarked by others
today I make something...
something to replace others'
yesterdays.

rememberable
irreplaceable
remarkable
...
like yesterdays.

Today
what if...
what if I reject
what if I reject to do
yesterdays?

Tomorrow
what am I?

두가지 practice.

1
false monuments.

2
false memory.


닿을 수 없는 그 곳에 있는 그것처럼.
닿을 수 없지만 보고싶은 맘으로
매개체를 통한 조우만이 허락된 그것처럼.

실제 실재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설사 그것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아무에게 의미를 갖기 전까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의미 있는 것을 바라 보고, 의미 있는 것을 행하고
언제나 의미를 알아야만 존재의 이유가 있는 이 시대의 삶 속에서
하나의 거짓 기억과도 같은, 하나의 거짓 존재와도 같은
결국은 그야말로 아무에게 이유가 있어 존재하는 그것들이
누군가에겐 무의미를 넘어 존재조차 희미한 기억으로,
희미한 기억조차 남기지 못한 존재로
함께 존재하며 한 세상을 공유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일방적인 기억은 존재를 확인케 해주는지.
쌍방의 소통에 의해 서로의 존재를 각자의 삶 안에서 서로 키워나가는 것만이
존재의 기억이겠지.

사랑의 존재는 너무나 좋은 기억이라 당연하지만
미움과 비난의 순간 또한, 모든 것이 결국 나의 존재를 확인케 했던 것들이겠구나.

문득, 누군가를, 누군가와 슬피 나눈 기억마저 존재를 확인한 과정이란 생각에.

내가 미워한 존재, 나를 미워한 존재, 서로의 존재를 위협한 존재마저도 
나의 실재함을 유한한 삶 속에서 그 삶으로 증명해 내보이던 존재들이란 생각에.
그런 생각에 기분이 이상해진다. 눈물이 날것같다. 


어쨋든.

아무에게 아무것은 어떤 것이겠거니라는 맘으로
아무것은 머리속에서 사라진다.
봐도 본것이 아닌.

false memory는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
봐도 본것이 아닐 것이 만약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차이점을 느끼게 되는가.
그 차이점을 느끼기엔 넘치는 정보와 자극들로 삶이 가득한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내 삶에 필요하다 여겨 그 존재를 내 생활 안에 기억해 놓은 것은 무엇인지.
내 삶에 필요없다 여겨 그 존재조차 모르고 지낸 그것들은 무엇인지.

무엇에 의해
무엇이

우리 삶에서
일상의 그것들을
그 경중에 따라 그저
그저 없는 존재로 분류하였는지.

삶 속에서
어떠한 거름망에 의해
흔적도 없이 걸러져
사라져버렸는지.


---
이것은 '2.50'의 일상의 것에 관한 도전과도 의미가 닿아있는 듯 하다.

문득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리를 보던 나는 깨달았다.
난 거기에 닿을 수 없다.
보이지만 저기 저기에 있다는 걸 알지만,
내가 갈 수 없는 저 곳.

나에겐 사진 속 오로라처럼
그저 바라보며
언젠가 닿을 수 있겠지 소망하지만.

2.50

victoria market, 
melbourne, australia
2010

하루 이틀 이야기.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72300209205008&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07-23&officeId=00020&pageNo=5&printNo=17782&publishType=00020

dig a hole. - concept drawing.















temporary.

너 나 우리. 나 너 너희들.

그들과 우리라는 인식을 생각해본다.


나는 너희들보다 좀 늦게 이주해 온 이주민이다.
이미 8년을 여기서 보낸 나의 사람은 너희를 너희들이라 부른다.
그래 8년은 그래도 짧은 시간인가봐.
더 긴 세월이 아마 필요한가보다. 생각했다.


어느 날.


Bunjil에 대한 생각들이 오고 갔다.
너희들이 그들을 그들이라 부를 때
나는 너무나 큰 두려움과 속상함에 말문이 막혔다.


결국 이 생에
나는 너희들과 함께 우리들이 될 수 없음을 느꼈다.


당혹감을 감추며 나도 그들을 그들이라 불러봐도
그들은 결국 내 모습일 뿐.
너희는 결국 내게 어느새 그들이 되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redevelopment에 늘 따르는 진통의 근원.


다시개발. 이것의 참 의미는 나아짐을 의미한다.
하지만 누구를?이라는 대목은 목적을 대대히 선전하며 그 초점을 흐린다.


redevelopment는 새로움을 가져온다.
신선함. 새로움. 언뜻 일관되고 서로 통하는 듯이 흔한 좋은 뜻이지만
너무나 폭넓은 범주로 엄연히 다른 여럿을 하나의 속성으로 여기며
마치 우리가 우리지 너네가 뭐냐는 듯.
할 말 잃은 우리를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렇게 점점 이쁜 표정으로
새로운 우리와 헌 우리를 갈라 놓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누군가에게
비겁히 우리이지 않기를 바라보지만.
이제 재개발은 슬픔을 내포한다.
그것은 그 우리들에 진정 우리가 포함되지 못하고
우리들은 너희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주체가 너희들이고
우리들 중 너희와 흡사한 우리들만이 새 우리들이 될 수 있다.
우리들은 또다른 너희들이 되어
눈엣가시로 전락한다.
울어봐야 소용없다.
너희들이 된 우리들은 이제
새 우리들에게 우리의 자리를 양보하고 너희들을 바라보며
빈자리를 향해 흩어진다.


그것은 이미 사라져 흩어진 너희들이 지칭하는 그들처럼.


너 나 우리,
나 너 너희들.


함께라.
가볍게 미소지으며
흩날리는 무거운 맘.

동화처럼 요정처럼.

우연이 그냥 우연임을.
그런 단순한 우연이 나에겐 의미임을.

느껴지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애써 부정하고
아는 것을 느껴지는 것으로 애써 덮으려 할 필요 없다.
그냥 그러면 그런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어찌 일관된 무언가 있다 믿고 의지해 살 수 있을까.

그럴 필요 과연 무얼까.

나 맞음 너 틀리고
나 맞으니 너 틀렸고
그럴싸한 말들.
결국 누굴 위한 근거들.
나지 뭐. 누구겠어. 인류? 

아니다 해도 아닌게 있다면. 
그럼 아닌건 뭔가. 
타조가 왜그랬지.

아직 동화속에서 눈꼬릴 치켜뜨고 
나의 공주님을 지키고 있나
단지 나는 기사이므로?

일관성. 
그리하여 무결성.
integrity. 

그것이 갖는 의미는 늘 한결같이 순수하다.
아름답다.
마치 종교와도 같은. 
의미와 근원의 부정을 부정케 한다.
그것은 왜 그런가?
어찌 이리 한없이 늘 그런가?

근데 그게 말이 되나.
살다 살다 과연 살다 그걸 보았나?
너와 나는 그런가?

사람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
내가 어떤지.
결국 모르겠는 것.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보이지 않는 굴레를 벗는데 
한 실천이 되겠지.

옳은지 그른지 
잘 알지도 못해.

아는 척 행동하다 아는 줄 착각한다.
모른 척 행동하다 모른다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integrity.
동화처럼 요정처럼.

그래도 나는 사람인걸.
타조가 왜 그랬지 진짜?

aurora. - the first experience.

I met this while I was reading a book at dawn.
It was a rainy day as a usual winter day in this city.
The rain finally stopped.
I couldn't notice the emerge of it.
It disappeared when the dawn broke.

When will it be the next to meet her.

2.50

대상을 바라볼 때 사람의 기억은 그것을 그 대상으로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것은 상황과 기억처럼 개인의 '무언가'에 의해 항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무의미란 것은 어찌보면 정말 대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바라보고 대할 때 그것을 
그것 그대로의 온전한, 기호 이전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세상에 대한 기억이 시작되기 전부터 모든 과정은 자극과 반응에 의해
세상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즐거움으로, 익숙함으로, 지겨움으로, 지친 거부감으로, 변화로, 새로움으로, 즐거움으로, 익숙함으로..
반복되는 자극과 반응에 의해 주변은 카테고리로 나누어지고
범주화된 그것이 익숙해진 상태에서는 
더 이상 그것 이상의 혹은 이하의 다른 반응은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모든 대상 모든 감각에 의한 인지는 그 대상에 대한 빛, 음파, 진동 따위의 반응에 의한 결과.
그것은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심지어 정확한 관찰없이도 어느 범주의 충분조건 혹은 자격요건을 갖추게 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그것으로 인식된다.
그 인식의 빠른 정도는 삶의 꾸준한 의식적인 결국 무의식적인 훈련의 결과.

그 대상, 그 대상 자체는 객관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도 또한 범주화하던 버릇의 훌륭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극한의 사실을 다루는 과학, 감히 반론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면 이 프로세스는 필요없다. 
이미 그것은 종교처럼 하나의 이론이나 신념을 넘어선 절대적 존재이기에 그냥 그렇듯 그렇게 끝까지 살아가면 된다. 늘 삶.

늘 아기같은 새로움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글렀다.
이미 잊기엔 너무나 익숙한 자전거처럼 이미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그것은 되돌리기 참 힘들다.

엘란트라, 그랜져 89년형, 포터,

입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것은 그래, 엘란트라, 그랜져, 포터지.
실제와 비교하기 전까지 너무나 익숙한 그것과 낯설게 조우하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은 정말 찰나만큼 아리송히 낯설다가 다시 익숙해진다.
어찌 그랫나 싶을만큼 그 순간은 오지 않거나 극히 순간적이거나.

되돌리기 힘든 만큼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것의 힘은 정말 놀라우리 만큼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그것을 느끼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장 손쉬운 별 생각없는 방법은 
환경을 크게 바꿔보는 방법.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삶의 터전을 옮기기에는 너무나 이룬 것이 많은 나의 동시대인들에게는 매력적인듯 하지만 가당치도 않는 남 얘기일지도 몰라서.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본다.

그에 따른 실천의 실마리 중 하나가 '2.50'.
일단 나 스스로 느끼는 일상의 미를 꺼내본다.
혼자 스스로 몰두해 매력을 느끼던 대상을 그 훈련의 도구로 삼아본다.
'2.50'를 심고 나서,
Joe가 느끼는 또 다른 일상의 매력을 또 하나의 씨앗 삼으려 한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까지 Joe의 관점은 보다 디자인적인 측면에 있다는 점이다.

점차 하나 하나 그 실천의 종류를 늘려나가다 보면 
대상의 '대상화하기'를 통해 무의식을 무장해제 시킨 후 그 고정된 인식을 서서히 변화시켜 본다.
이것은 단발적인 하루 이틀의 과정이 아닌 
세월을 요하는 프로세스이다.
그 핵심은 뭉근한 변화에 있다. 
급작스런 삶의 변화가 아닌,
누가 시켜서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닌,
스스로 변화하였음을 느끼게 하는데에 이 프로세스의 목적이 숨어져 있다.
단지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스스로 변하는지를 보고자 한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서 타인의 취향까지.
나 스스로부터의 실천이 publc의 일상에 씨앗을 심는다.

aurora. - observe it whether you can reach it or not.

실제인지 아닌지는 바라보는 관점과 상황에 기인한다.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 중요한지,
그것을 만졌다는 것이 중요한지.
실제함에 대한 생각은 실제와 거짓과는 상관없이
그 관점과 상황이 이끄는 결과에 의한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감에 의해 세상을 인식하는 한계안에서
그 실제에 대한 의미를 관찰한다.

아닐 수 있음을 진심으로 느껴본다.

소위 능란한 '말'과 흔히 빌리는 '사고'의 힘을 빼본다.

이것은 'Fix' 시리즈와도 연관된다.



















Fix 'soap', 2008 / tae

aurora.

layers - strada.

감추려는 것 사라지는 것.

감추려다 드러나고
드러내다 사라지는 것이 있다.

둘은 아닌듯 결국 함께.

모난, 고운.

하루 하루를 보내며
세월에 의해 산화되는 삶은
닳고 닳은 너와 내가 되는가 하면,

푹 고아져
희미한 빛깔, 찐득히 녹아든
너와 나
훌훌 삼킬 수 있는 진국이 되기도 한다.

Layers.
그것은 생활을 반영한다.
나를 보라고 좀 나를 보라고
고래고래 형형색색
눈길을 끈다.

한달, 한주 얼마 안가 그것은 또다른 색으로 덮힌다. 깨끗이.
풀은
, 본의 아니게,
, 그 전의 의미를 뭉게며,
, 보란듯이,
1미리도 되지 않는 역사와 역사를 끈적히 붙인다.
켜켜히 떡진 그 이야기를 알기 위해선 조심스레 한장 한장 뜯어내며
무심히 붙이던 그 시간의 수 배 노력을 땀내나게 쏟아야 한다. 짜증.
사라지는 것의 조바심에 비하면 그 오만상은 비할 바 아니다.

드러내는 것이 더 많았던 그것은 이제 그 의도와는 다르게
푹 감추어져 버렸다. 지나간 역사는 더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듯.

숨겨진 의미는 사실 땀흘려 알 필요조차 없는
흩날리는 정보.

실은 그 분해의 과정이 존재의 이유. 땀.

The answer is...
조용히 조용히 세월의 산화속에 숨겨진 의미가 드러난다.
그 과정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해주며
기대감에 사람들은 그것을 괴물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의도를 알든 모르든

사라지는 것에 대한 원초적 말초적 근심으로
오히려 그 존재를 지키려 할지도 몰라.
그래,
오히려 그 존재를 감추게 될지도 몰라. 그래.

그러다,
그 존재의 이유가 희미해질 무렵
그들의 원초적 말초적 에너지가 희미해질 무렵
그 존재는 오히려 서서히 한 겹 한 겹
자연의 풍화, 흐름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 거다.

그러나 무엇을 기대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든 무의미한 매순간의 우연이 그들 삶을 값지게 하듯.
그 순간이 올 즈음, 우연을 값지게 받아들일 이 얼마나 있을까.

퀴이즈도 아니고.

적어도 허무 삶이 되지 않기를.

dig a hole.

dig a hole to.

Stopped qusestions. / childhood imaginary.. / DIG - Dig a hole to the other side of the world.

I stopped asking questions like these after I watched The Magic Schoolbus (serious)


http://forum.bodybuilding.com/archive/index.php/t-3203791.html


Stopped questions.

Stopped questions. / childhood imaginary.. / DIG - Dig a hole to the other side of the world.

Flinders Crt.
















































dig.
dig a hole.
dig a hole to the other side of the world.
disguise it as a drain.

Hollywood ending.



삶은 경험으로,
무언가를 느낀다 해도 얄팍한 머리로 깨닫는 것은 아닌,
느끼게 되었다 해도 그 순간부터가 아닌,
그 무언가 행동을 유발토록 하는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게 되는, 
그런 절박함이 있는 상황일 때
그간의 작용만큼 반작용의 희생을 통해 또 다른 의미에 눈을 뜬다.


사람은 알고 있다하더라도, 
스스로의 삶의 조건에 의해 모를 수 밖에 없게 된다. 모르는 것만 못 한 상황.
이는 아는 척 하는 시시한 시기, 보고싶지 않은 것은 안보면 된다. 
pathethic.


그렇게 평생 살 수 있다면 헐리우드 엔딩.


그 삶을 달리 볼 수 있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혹은 어느정도 의도적으로.
스스로의 삶에 대한 정도. 정도에 따라 그 순간을 맞을 확률은 결정된다. 
defamiliarization.


성격과 조건은 서로에게 끝없이 영향을 주면서 그 삶을 지휘한다.
삶의 지휘권 박탈은 행복감에 대한 오해에 비롯한다.
회복의 순간은 스스로의 관점과 행동에 달려있다.
잘 짜여진 헐리우드 엔딩과 삶의 해피 엔딩.


그 모습은 같지만 맛이 다르다. 
the wax and plastic replicas of menu offerings (displayed in restaurant windows)

해피 엔딩.



마치 눈이 먼듯.
모든 사물, 환경, 사람, 심지어 삶까지도 어떤 카테고리 속에 분류되어 단순화된다.
그 신속한 인식 덕분에 사람들은 미치지 않고, 시간낭비 없는 효율적인 
어떤 삶을 하루 하루 더 이어나간다.
생각 할 것도 많은 삶에 사소한 순간들은 그저 꿈처럼 흘러간다.
봐도 본 게 아니듯,
익숙한 삶. 

언젠가 때로는 눈을 뜨게 하는 어떤 것을 만났을 때, 
너무나 낯설어 미칠지도 모른다.
그 익숙한 삶.

deciperment























layers -> arena of unofficial, official records of history / desire, strug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