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낯선 도시에서 그들의 행위 - 그들 스스로에겐 익숙한 행위 - 그 자체를 지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학습의 정도 차이 때문이다. 대상이나 상황의 자극(혹은 시그널, 기호)가 전달 되었을때 그 사회적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혹은 그 사회 구성원의 도움없이는, 나 스스로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그것을 해독해야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대중은 오롯이 어제와 같은 삶을 내일도 누리기 위해서, 어제의 삶보다 너무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발전, 그 흔들리지 않는 현실을 위해 적응과 사회화는 대중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수많은 시그널과 사회 구성원으로서(혹은 구성원으로써) 처리해야할 정보와 임무가 매일 대중에게 전달된다.
그런 와중 잠시 어제와 다른 형태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절대적인 시간을 요하는 과정으로, 그의 피로를 유발하는 위험한 행위가 된다.
본능적으로 도전은 꽉 짜여진 현실안에서 그 현실을 더욱 공고히 하지 않는다면 피하게 마련이다. 대중에게 도전이란 이 현실을 더욱 더 굳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할 뿐, 이 현실의 그 이면,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 현실을 달리 보라 강요한다면 그것은 무자비한 독재와 오만으로 인식될 뿐이다. 보다 온건하고 장기적인 자극으로 그 변화를 스스로 일으켰다 여기도록 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이 심한 요즘의 대중을 진심으로 도전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산재해 있는,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익숙해 그 자극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처리 되고 있는 소재를 파악한다. 그 소재가 지닌 사회적 의미 속에 정서적인, 개인적인 의미를 심는다. 그리고 한번의 강한 충격 - 추억 - 을 가한다. 세월이 흐른다. 일상 속에서 그 소재에 드믄 드믄 노출이 되며 강한 충격은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질 즈음 그 스스로는 그 소재에 대한 개인적 의미와 시각을 갖게 됨다. 이제 사회적인 의미의 기호는 좀 더 틈을 지닌 시그널을 더하게 된다.
일상을 이제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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