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 우리. 나 너 너희들.

그들과 우리라는 인식을 생각해본다.


나는 너희들보다 좀 늦게 이주해 온 이주민이다.
이미 8년을 여기서 보낸 나의 사람은 너희를 너희들이라 부른다.
그래 8년은 그래도 짧은 시간인가봐.
더 긴 세월이 아마 필요한가보다. 생각했다.


어느 날.


Bunjil에 대한 생각들이 오고 갔다.
너희들이 그들을 그들이라 부를 때
나는 너무나 큰 두려움과 속상함에 말문이 막혔다.


결국 이 생에
나는 너희들과 함께 우리들이 될 수 없음을 느꼈다.


당혹감을 감추며 나도 그들을 그들이라 불러봐도
그들은 결국 내 모습일 뿐.
너희는 결국 내게 어느새 그들이 되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redevelopment에 늘 따르는 진통의 근원.


다시개발. 이것의 참 의미는 나아짐을 의미한다.
하지만 누구를?이라는 대목은 목적을 대대히 선전하며 그 초점을 흐린다.


redevelopment는 새로움을 가져온다.
신선함. 새로움. 언뜻 일관되고 서로 통하는 듯이 흔한 좋은 뜻이지만
너무나 폭넓은 범주로 엄연히 다른 여럿을 하나의 속성으로 여기며
마치 우리가 우리지 너네가 뭐냐는 듯.
할 말 잃은 우리를 할 말 없게 만든다.


그렇게 점점 이쁜 표정으로
새로운 우리와 헌 우리를 갈라 놓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누군가에게
비겁히 우리이지 않기를 바라보지만.
이제 재개발은 슬픔을 내포한다.
그것은 그 우리들에 진정 우리가 포함되지 못하고
우리들은 너희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주체가 너희들이고
우리들 중 너희와 흡사한 우리들만이 새 우리들이 될 수 있다.
우리들은 또다른 너희들이 되어
눈엣가시로 전락한다.
울어봐야 소용없다.
너희들이 된 우리들은 이제
새 우리들에게 우리의 자리를 양보하고 너희들을 바라보며
빈자리를 향해 흩어진다.


그것은 이미 사라져 흩어진 너희들이 지칭하는 그들처럼.


너 나 우리,
나 너 너희들.


함께라.
가볍게 미소지으며
흩날리는 무거운 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