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 셈법은 얼마나 믿어야 하나 
카푸친 씨는 고성능 컴퓨터와 같은 계산능력을 가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아니다. 그런 카푸친 씨가 정글경제를 살아가는 데 휴리스틱은 매우 유용한 의사결정 방식일 수 있다. 정글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젤 무리는 사자의 기척만 느껴도 이리저리 따져보지 않고 일단 뛰고 본다. 차분하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겨를이 없다. 직관과 주먹구구로 신속한 판단을 내리는 휴리스틱은 인간의 중요한 생존본능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휴리스틱은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 주먹구구의 한계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카푸친 씨는 자신의 주먹구구 셈법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과신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보이는 만큼, 들리는 만큼. 
그렇다면 
생각이 많아 틀 속에 콕 갇히던지, 
생각없어 틀조차 못느끼던지.
결국 저도 모르게 죽어가나보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그 무언가 그림자를 바라보고.
경우에 따라 스스로 그 맹신 정도에 따라
뜻없는 말을 자신있게 하나보다.
힘들다 힘들어.

이제 말을 아끼고 행동을 보일때.
다만 얄팍알량한 자신만이 유일한 기준 아니기를.
목적을 위해 큰 맘 쓰기를.

상상해본다. 
낯선 외계행성에서 
가능성 알길 없는 인류를 찾아 나설지.
아님 오늘 하루라도 그들 언어를 익힐지.
딱 그정도가 나의 지금 틀인가싶다.
틀인가싶은거보니 아닌가보다.

사람이 그리운건지 대화가 그리운건지
때론 그렇고 때론 저렇다.
차라리 말이라도 하는게.
차라리 틀에 박힌 말이라도.

발아.

씨앗이라 말씀 드렸다.
쭉 듣던 그 분이 내 입을 통해 입을 여신다.
아냐 씨앗이라기보단 바이러스다.


그래 난 지금 침투작전을 준비중인
침투조 비밀요원이다.

이렇게 느린 속도로 허나 쥐도 새도 모르게
뭉근한 침투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씨앗을 심던 내가
이제 바이러스 침투를 진두지휘하려 한다.


뭔일인지 보이는 것만 보이고
들리는 것만 들린다 불평했었다.
차라리 눈먼 벙어리라면 했었다.


침투를 생각하니
그리 보이는 것 불행하지만은 않다.
그리 조잘대던 그 잡소리 거슬리지만은 않다.
그게 다 내가 이리 이리 흐르도록 한 비료겠지. 똥비료.


이제 난 바이러스를 품은 보균자.


다행이다. 하마터면 놓아버릴뻔 했어.


모든 인연과 우연에 이토록 맘 담아 감사한 적 드물었는데.
그 분은 학교도 일도 쓰잘데기 필요없다 하셨지만
결국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만나게 되는 싹이었음 느낀다.


너무나 극단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무서운 미래지만 너무도 당장 신이나는.

맘에 심은 씨앗이 오늘 예기치 않게 발아했다.


징소리가
은은하게 한번
강하게 또 한번
출동. 
손수 징을 쳐 알리셨다.

추운 겨울 우이동 낡은 폐가
도란도란 재미나게 낄낄낄 맘을 비웠다
맥심커피 귤까먹고 호두 유과 노나먹었다
쥐도 새도 아무도 모르게 
내 맘 두터운 껍질이 샬샬샬 녹았다.

대체 얼마만이냐.
대체 왜 이제서야.

뜨겁다. 
따듯하다.

/


게릴라와 같은 시작은 일단 포석이 되겠다.
반복이 주는 힘으로 천진난만한 상태가 되겠다.
뜻이 있으므로 반복을 택하겠다.
1년은 그렇게 세균전의 시발이 되겠다.

기호라 생각이 든다면.

내가 낯선 도시에서 그들의 행위 - 그들 스스로에겐 익숙한 행위 - 그 자체를 지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학습의 정도 차이 때문이다. 대상이나 상황의 자극(혹은 시그널, 기호)가 전달 되었을때 그 사회적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혹은 그 사회 구성원의 도움없이는, 나 스스로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그것을 해독해야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대중은 오롯이 어제와 같은 삶을 내일도 누리기 위해서, 어제의 삶보다 너무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발전, 그 흔들리지 않는 현실을 위해 적응과 사회화는 대중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수많은 시그널과 사회 구성원으로서(혹은 구성원으로써) 처리해야할 정보와 임무가 매일 대중에게 전달된다.
그런 와중 잠시 어제와 다른 형태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절대적인 시간을 요하는 과정으로, 그의 피로를 유발하는 위험한 행위가 된다. 

본능적으로 도전은 꽉 짜여진 현실안에서 그 현실을 더욱 공고히 하지 않는다면 피하게 마련이다. 대중에게 도전이란 이 현실을 더욱 더 굳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할 뿐, 이 현실의 그 이면,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 현실을 달리 보라 강요한다면 그것은 무자비한 독재와 오만으로 인식될 뿐이다. 보다 온건하고 장기적인 자극으로 그 변화를 스스로 일으켰다 여기도록 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이 심한 요즘의 대중을 진심으로 도전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산재해 있는,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익숙해 그 자극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처리 되고 있는 소재를 파악한다. 그 소재가 지닌 사회적 의미 속에 정서적인, 개인적인 의미를 심는다. 그리고 한번의 강한 충격 - 추억 - 을 가한다. 세월이 흐른다. 일상 속에서 그 소재에 드믄 드믄 노출이 되며 강한 충격은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질 즈음 그 스스로는 그 소재에 대한 개인적 의미와 시각을 갖게 됨다. 이제 사회적인 의미의 기호는 좀 더 틈을 지닌 시그널을 더하게 된다.

일상을 이제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957&category_type=series

그러니까 내말은.

어.
그러니깐.
니 무어냐고.
연기력이 날로 늘어가.

사파리 한판 더?

사파리투어.

있잖아 내 친구 얘긴데,


하며 운을 띄우면 나도 솔깃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어느새 그런 얘긴 듣기 싫어져 버린다.
듣기 싫어졌다기보단...


솔깃하지만 듣기 싫은 얘기.


결국 이 나와의 대화를 위해 너와 나 함께 나누는 이 시간에
누군가의 삶을 시시덕, 혹은 - 때론 분위기상 - 진지하게 끄집어다
썩썩 썰어먹는다.


자기 얘긴 아니지만 친구 얘기라는 그 얘기.
어쩐지 기쁘다면 웃어주면 되고
다행히 안됐다면 얼굴을 굳히면 된다.


달라지는 현실없이


그냥 그렇게 또
또 그렇게 나를
나의 위치를 내 모습을 또 다시
확인한다.


사냥하는 사냥꾼들.


내 얘기, 내 삶도 언젠가 너와 너의 누군가와 함께
500짜리 맥주로 꿀떡꿀떡 넘어가겠구나.
혹, 그 얘기가 너의 멋진 의미에 아름다운 근거를 주겠구나.
난 이렇게 멋진 얘기를 낚아 올랐다며


그 의미도 모른채 
느끼지 못한 그 삶을 대가리로 
망설임없이 써나간다.


듣다보면 내가 싫어진다. 말하다보니 할 말이 없다.


화자가 바라보는 세상에 화자는 없다. 
세상을 낚느라 정작 내가 누군지 잊었다.
뭔가를 말하는 의미심장함에 텅빈 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정신이 없다. 낚아 올리느라. 기록하고 기억하느라.
이 순간을, 이 장면을 담느라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 틈이 없다.
그냥 뭐 멋지느라 바쁘다.


이렇게 나의 일상은 또 어디선가 짜여진 틀로 창작되어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로하겠지.


사냥하는 사냥꾼.


있잖아 내 친구 얘긴데,
하며 운을 띄우면 나도 솔깃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만다.


차라리 사파리를 하지 그래.


철갑을 두른 사파리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본다.
호소력 깊은 눈빛 연기로, 그 쓸데없이 예리한 눈으로 바라본 타인의 삶.
니 삶, 어디 여행기나 적다 끝날라.


투어리스트.

본질과 목적. 수단과 욕망.

신비로운 몇가지.

그 목적이 무언지에 따라 본질을 선택하는 경우.
이기적 욕망으로, 본능적인 자기방어.
그래서 알든 모르든 스스로를 기만할 경우.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 나머지 의미를 잃을 경우.
스스로의 오류에 대해 생각을 잃을 경우.

흔히 목적은 그럴듯하며, 행위는 사라진다.
본질은 선택이 되어 훌훌 날린다.
기회주의는 자라난다. 자각하지 못한채 싹이 튼다.
돌이켜 보면.

생각이 생각으로 그친다면 항상 기회주의와 위선의 틈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는건지도 모르겠다.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쉽겠지만. 그리 쉽지 않으니. 단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그 목적을 위한 최선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위선을 떨쳐버리기 위해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잡기 위해 큰 목적은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것. 그것에 그야말로 의미를 두고 끝을 맞이한다. 어디서 흘러들어온지 알 길 없는 그럴듯한 의미로 감싼다. 이렇게 본질은 가려지고 희한한 논리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목적은 수단으로 지워진다. 찾아가는 길이었다 말한다. 깊은 속 알길 없는 너와 나의 욕망으로. 뜨끔 뜨끔 뭔가 알겠다 싶을 땐 이미 늦었다. 이미 굳어진 이미지에 실은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말한다면 그 삶이 뭐가 되겠어. 그냥 그렇게 살다 가면 되겠다 싶은 맘으로. 욕망에 의해 지워진 목적은 본질이 슬쩍 뒤바뀐채 저잣거리에서 우상이 되어 나뒹군다.

행동은 온데 간데 없고, 말들이 날뛴다.
행동이 설령 온다한들, 그 목적은 본질이 아닌 자기 만족일 뿐.
부여잡은 행동은 그 목적이 본질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다만 스스로 알 길 있다면.
근데 그게 불가능한게, 알았다면 그렇지 않겠지.
단지 존재는 타인의 시선에 구속되어 발을 동동 구르니.

행위없는 공허한 말들이나.
본질잃은 알량한 행위들이나.
정도의 차이. 그냥 다 그랬구나.
부끄럽게 얼굴이 타오르는 밤.
폼나게 색안경을 끼고 밤길 어둡다 칭얼거린다.

내일은 또 누굴 만나 씨앗을 뿌리나.
주렁주렁 달린 탐스런 거짓부렁.
뻥치시네 소리에 놀라 움찔 보니
코에 난 구멍에 손을 후벼박고 꼬맹이가
내쪽으로 온다.
싶더니 휙 지나쳐 저리 간다.

드러워죽겠어.
엄만 너도 저랬다며
키워봐야 저 맘 안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