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함, 솔직함에 매료되지 않고 그냥 그 스스로 그렇게 되었을 즈음 봇물터지듯 보이기 시작하는 소소함의 전율.
인위적 강압에 의한 모든 행위는 뜻하지 않는 반발심을 일으킨다. 그것이 의도일 경우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대게 그저 짧은 인생의 급한 욕망에 의한 결과였음을 그냥 알고 말게 된다. 실망할 것은 없다. 반발심은 결국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던 숨은 욕망이고 힘이었으니. 그렇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내가 그러한 힘, 의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고 있더라도 그렇게 행동할 용기가 있는 것인지.
멍청함을 보면 나는 지혜롭다.
몰상식을 대면할 때 나는 교양인이다.
아첨을 보면 나는 부끄럼을 안다.
교만을 보면 나는 겸손하다.
비열함에 나는 정의를 본다.
치사한 속물을 바라보며 나는 느낀다.
...
그렇다면 거꾸로는 어떠한가.
내가 멍청할때 누군가는 나를 보며 그 스스로 지혜로움을 바라본다.
내가 몰상식한 행동을 할 때 누군가는 나를 보며 그 스스로 교양을 생각한다.
내가 아첨을 떠는 동안 누군가는 그 부끄러움에 나는 그렇지 않다며 혹은 않아야겠다며 당당함을 바라본다.
나의 치사함에 그는 혀를 차며 인간이 그따위일까 생각하며 그 스스로를 다잡는다.
...
목적이 무언가를 누군가의 심정에 진심으로 느껴지도록 하기 위함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허나 이런 반발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의 굴욕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단호함이 있어야한다. 어쩌면 뻔뻔함일 수도 있고.
그러나 삶은 어떻게 살았는가, 어떤 상태로 죽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세상에서 진실로 그 의도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상태에서 저런 자살행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인지. 그 스스로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심히 알고, 그 비루함을 견뎌낼 뚝심과 내면이 있고, 동시에 그 행위에 취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그 행위를 즐기려 노력하지 않고 그저 무심할 수 있는 담담하고 소탈한 유쾌한 사람 몇 있을까. 이는 실험이라고 할 수 밖에 없겠다. 이것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인물이 형성되는 이유인가. 예술이라 표현 할 수 있는 영역을 누군가는 글로, 행위로, 삶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런 힘을 충분히 이해하고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있을까. 실재함을 대면하는 것은 단순하고 무식하리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가상의 한계는 결국 그 틀을 전제하고 그 스스로 취해있을 때만 성립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모른척하려해도 틀이 보이는 상황만큼 우스꽝스러운 것이 없다. 아무튼 늘상 말만 그럴듯이 뻔한 이야기 뻔하게 해대는 상대의 지리함에 힘을 얻어버리는 내가 또다른 속물인가 싶은. 위대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