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장황히 설명할 필요없이, 그것은 이런 듯 보인다.

평범한 일상에 뭔가 나타나길 기다리지만 그게 무언지 알길없는 하루 하루.
하루 하루 지나치는 이 길에서 뭔가 새로운걸 꿈꾸지만 그게 뭔지 손에 잡히지 않는 평범한 일상.
그러나 이 마법같은 주문의 하루(Seeding)를 보내고 나면, 그래서 그 흐름 속에서 하루 하루(Fermentation)를 보내다보면 스믈스믈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이것 저것들. 결국 소박한 일상에서 소탈한 미를 하나 하나 주워가며 특별함이 과연 무엇인지-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지-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다.

일상의 대변혁 없이도, 폭풍같은 격정이나 혁명따위의 거창함 없이도, 개인의 삶은 충분히 다채롭고 신기할수도 있는지-소위말하는 의미 따위가 있는지-조용한 태도로 씨앗을 심는다. 결과를 알 수 없음에 끝없이 묻고 찾게 되는 행위의 연속. 해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닌 행위의 과정 자체가 목적인 의도. 의도가 숨은, 행위로의 유도 속에 숨은 목적이 있다. 그야말로 '내가 모르는 앎' 속에 스스로를 위치하게 한다. 대상은 그렇게 빠져든다. 그리고 언젠가 무심코 '아!' 한다. 그것은 이 기나긴 과정의 원형적인 의도의 알아차림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바라본 어떤 대상에 무언가를 느낀 상태의 표현의 외마디이거나.

목적을 위한 행위가 역설적인 결과를 낳지 않도록 영광스런 의도의 발설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느긋함으로 때를 기다린다. 안달스런 평가를 삼가한다. 지양해야 할 것은 이미 있다고 여겨지는 법칙이나 방법, 그걸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권위에의 집착과 투항, 환상. 지향해야 할 것은 역설적 결론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이 의도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의도는 앞으로 일어날 행위의 연쇄반응 안에서만 그 의미가 살아있음을 이해하는것. 즉, 자위에 기만당하지 않는것. 알량한 자위적 해석이나 근거의 허울에 빠지지 않도록. 무조건이 조건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모토임을. 아닌것은 아님을 느끼는 것.

결국 그것은 끝이 없는 행위 속에 놓여있을 때 역설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나아갈 수 있음을 느낀다. 시작이 시작을 부르는 고이지 않는 흐름 속에서 그것의 진정한 의도는 퇴색되지 않으리라 현재 나는 상상한다.

$2.50 - Take it for granted.

위대한 힘.

소탈함, 솔직함에 매료되지 않고 그냥 그 스스로 그렇게 되었을 즈음 봇물터지듯 보이기 시작하는 소소함의 전율.

인위적 강압에 의한 모든 행위는 뜻하지 않는 반발심을 일으킨다. 그것이 의도일 경우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대게 그저 짧은 인생의 급한 욕망에 의한 결과였음을 그냥 알고 말게 된다. 실망할 것은 없다. 반발심은 결국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던 숨은 욕망이고 힘이었으니. 그렇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내가 그러한 힘, 의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고 있더라도 그렇게 행동할 용기가 있는 것인지. 

멍청함을 보면 나는 지혜롭다. 
몰상식을 대면할 때 나는 교양인이다. 
아첨을 보면 나는 부끄럼을 안다. 
교만을 보면 나는 겸손하다. 
비열함에 나는 정의를 본다.
치사한 속물을 바라보며 나는 느낀다. 

...

그렇다면 거꾸로는 어떠한가.

내가 멍청할때 누군가는 나를 보며 그 스스로 지혜로움을 바라본다.
내가 몰상식한 행동을 할 때 누군가는 나를 보며 그 스스로 교양을 생각한다.
내가 아첨을 떠는 동안 누군가는 그 부끄러움에 나는 그렇지 않다며 혹은 않아야겠다며 당당함을 바라본다.
나의 치사함에 그는 혀를 차며 인간이 그따위일까 생각하며 그 스스로를 다잡는다.

...

목적이 무언가를 누군가의 심정에 진심으로 느껴지도록 하기 위함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허나 이런 반발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의 굴욕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단호함이 있어야한다. 어쩌면 뻔뻔함일 수도 있고.
그러나 삶은 어떻게 살았는가, 어떤 상태로 죽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세상에서 진실로 그 의도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상태에서 저런 자살행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인지. 그 스스로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심히 알고, 그 비루함을 견뎌낼 뚝심과 내면이 있고, 동시에 그 행위에 취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그 행위를 즐기려 노력하지 않고 그저 무심할 수 있는 담담하고 소탈한 유쾌한 사람 몇 있을까. 이는 실험이라고 할 수 밖에 없겠다. 이것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인물이 형성되는 이유인가. 예술이라 표현 할 수 있는 영역을 누군가는 글로, 행위로, 삶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런 힘을 충분히 이해하고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있을까. 실재함을 대면하는 것은 단순하고 무식하리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가상의 한계는 결국 그 틀을 전제하고 그 스스로 취해있을 때만 성립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모른척하려해도 틀이 보이는 상황만큼 우스꽝스러운 것이 없다. 아무튼 늘상 말만 그럴듯이 뻔한 이야기 뻔하게 해대는 상대의 지리함에 힘을 얻어버리는 내가 또다른 속물인가 싶은. 위대한 힘이다.

fermentation - anonymous, $2.50

'무엇이 예술인가.'


'우리는 예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받아들이는가?' 라는 오랜 인식의 틀에서
'과연 무엇이 예술인가?' 라는 가려진 의문에 또한 눈길을 주곤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시원치가 않다. 결국 그것은 또다른 규칙과 권위를
만들기 위한 수작. 따위에 생명을 빼았기어 아까운 하루하루 웅장한 헛소리를 양산한다.


예술을 위한 절차.


예술을 위한 규칙과 관문은 갈수록 낮아지는듯한 뒤태로 높아져가는 문턱을 능글히 가린다.
규범화, 규칙화, 규율화 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마저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미의 소박하고 솔직한 스스로의 단서조차도 떳떳히 받아들이기 힘든 불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예술인가?' 라는 말은 그 안에 자조적이지만 이미 어떤 가능성을 숨기고 있다. 하루하루 꼬박꼬박 살며 '네가 스쳐지나간 그것. 우연히 발에 차인 그것. 버려진 그것. 한때 소중한 그것. 소중한 것, 모든것, 어떤것' 일 수 있는 그것. 그것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 그것. 째깍째깍. 규칙의 일련속에서 우연히 그 틀의 존재와 틈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그것. 삶의 시간을 들여 그것을 줍는 그것. 그것이 이끄는 그것. 씨앗이 되는 그것.


그것이 예술의, '규범화 할 수 없는' , '규칙 저 너머 깊은 곳에 심성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 그 무언가가 내 삶 속에 녹아 쌓이고 있었음을 느끼고 스스호 떳떳히 해주는 역할. 커밍아웃은 어느새 그렇게 시나브로 이루어진다고 나는 느낀다. 


이것은 일상을 좀 더 야릇한 곳으로, 내일이 기대되는 곳으로 모두의 커밍아웃을 유도한다.


결국 이것은 먼 시간 지나면 아마도 fermentation의 서막이었음을 알게 되겠지.


소탈함, 솔직함에 매료되지 않고 그냥 그 스스로 그렇게 되었을 즈음 봇물터지듯 보이기 시작하는 소소함의 전율.

fetish

mundane treasure.
everyday fetish.


object + * = ! fetish


everything is somebody's something.
주먹구구 셈법은 얼마나 믿어야 하나 
카푸친 씨는 고성능 컴퓨터와 같은 계산능력을 가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아니다. 그런 카푸친 씨가 정글경제를 살아가는 데 휴리스틱은 매우 유용한 의사결정 방식일 수 있다. 정글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젤 무리는 사자의 기척만 느껴도 이리저리 따져보지 않고 일단 뛰고 본다. 차분하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겨를이 없다. 직관과 주먹구구로 신속한 판단을 내리는 휴리스틱은 인간의 중요한 생존본능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휴리스틱은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 주먹구구의 한계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카푸친 씨는 자신의 주먹구구 셈법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과신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보이는 만큼, 들리는 만큼. 
그렇다면 
생각이 많아 틀 속에 콕 갇히던지, 
생각없어 틀조차 못느끼던지.
결국 저도 모르게 죽어가나보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그 무언가 그림자를 바라보고.
경우에 따라 스스로 그 맹신 정도에 따라
뜻없는 말을 자신있게 하나보다.
힘들다 힘들어.

이제 말을 아끼고 행동을 보일때.
다만 얄팍알량한 자신만이 유일한 기준 아니기를.
목적을 위해 큰 맘 쓰기를.

상상해본다. 
낯선 외계행성에서 
가능성 알길 없는 인류를 찾아 나설지.
아님 오늘 하루라도 그들 언어를 익힐지.
딱 그정도가 나의 지금 틀인가싶다.
틀인가싶은거보니 아닌가보다.

사람이 그리운건지 대화가 그리운건지
때론 그렇고 때론 저렇다.
차라리 말이라도 하는게.
차라리 틀에 박힌 말이라도.

발아.

씨앗이라 말씀 드렸다.
쭉 듣던 그 분이 내 입을 통해 입을 여신다.
아냐 씨앗이라기보단 바이러스다.


그래 난 지금 침투작전을 준비중인
침투조 비밀요원이다.

이렇게 느린 속도로 허나 쥐도 새도 모르게
뭉근한 침투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씨앗을 심던 내가
이제 바이러스 침투를 진두지휘하려 한다.


뭔일인지 보이는 것만 보이고
들리는 것만 들린다 불평했었다.
차라리 눈먼 벙어리라면 했었다.


침투를 생각하니
그리 보이는 것 불행하지만은 않다.
그리 조잘대던 그 잡소리 거슬리지만은 않다.
그게 다 내가 이리 이리 흐르도록 한 비료겠지. 똥비료.


이제 난 바이러스를 품은 보균자.


다행이다. 하마터면 놓아버릴뻔 했어.


모든 인연과 우연에 이토록 맘 담아 감사한 적 드물었는데.
그 분은 학교도 일도 쓰잘데기 필요없다 하셨지만
결국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만나게 되는 싹이었음 느낀다.


너무나 극단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무서운 미래지만 너무도 당장 신이나는.

맘에 심은 씨앗이 오늘 예기치 않게 발아했다.


징소리가
은은하게 한번
강하게 또 한번
출동. 
손수 징을 쳐 알리셨다.

추운 겨울 우이동 낡은 폐가
도란도란 재미나게 낄낄낄 맘을 비웠다
맥심커피 귤까먹고 호두 유과 노나먹었다
쥐도 새도 아무도 모르게 
내 맘 두터운 껍질이 샬샬샬 녹았다.

대체 얼마만이냐.
대체 왜 이제서야.

뜨겁다. 
따듯하다.

/


게릴라와 같은 시작은 일단 포석이 되겠다.
반복이 주는 힘으로 천진난만한 상태가 되겠다.
뜻이 있으므로 반복을 택하겠다.
1년은 그렇게 세균전의 시발이 되겠다.

기호라 생각이 든다면.

내가 낯선 도시에서 그들의 행위 - 그들 스스로에겐 익숙한 행위 - 그 자체를 지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학습의 정도 차이 때문이다. 대상이나 상황의 자극(혹은 시그널, 기호)가 전달 되었을때 그 사회적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혹은 그 사회 구성원의 도움없이는, 나 스스로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그것을 해독해야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대중은 오롯이 어제와 같은 삶을 내일도 누리기 위해서, 어제의 삶보다 너무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발전, 그 흔들리지 않는 현실을 위해 적응과 사회화는 대중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수많은 시그널과 사회 구성원으로서(혹은 구성원으로써) 처리해야할 정보와 임무가 매일 대중에게 전달된다.
그런 와중 잠시 어제와 다른 형태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절대적인 시간을 요하는 과정으로, 그의 피로를 유발하는 위험한 행위가 된다. 

본능적으로 도전은 꽉 짜여진 현실안에서 그 현실을 더욱 공고히 하지 않는다면 피하게 마련이다. 대중에게 도전이란 이 현실을 더욱 더 굳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할 뿐, 이 현실의 그 이면,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 현실을 달리 보라 강요한다면 그것은 무자비한 독재와 오만으로 인식될 뿐이다. 보다 온건하고 장기적인 자극으로 그 변화를 스스로 일으켰다 여기도록 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이 심한 요즘의 대중을 진심으로 도전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산재해 있는,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익숙해 그 자극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처리 되고 있는 소재를 파악한다. 그 소재가 지닌 사회적 의미 속에 정서적인, 개인적인 의미를 심는다. 그리고 한번의 강한 충격 - 추억 - 을 가한다. 세월이 흐른다. 일상 속에서 그 소재에 드믄 드믄 노출이 되며 강한 충격은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질 즈음 그 스스로는 그 소재에 대한 개인적 의미와 시각을 갖게 됨다. 이제 사회적인 의미의 기호는 좀 더 틈을 지닌 시그널을 더하게 된다.

일상을 이제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957&category_type=se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