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galomania (delusions of grandeur) - state of mind

Megalomania (delusions of grandeur)

'관람용 쌍안경'과 '진짜' 가짜 그랜드 캐년.

작은 것도 크게, 큰 건 더 크게.

관람용 쌍안경으로 보게 될 너와 나의 세상.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가능한지.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더이상 무슨 소용과 의미가 있을지.
무언가가 거기에 놓여있는것이 아닌가보다.
결국 무언가를 바라보는 너와 나의 시선이 거기에 있었을 뿐인가보다.

잣대와 시선.
너와 나의 판단.

깜냥.

EXTRA SIGNAL

여러가지 형태가 있겠다.

세상에 이러 저러한 이유로 자신이 필요하다고,
자신이 하는 바, 그러 저러한 까닭으로 소중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주장하는 데에는.

맞겠지. 아니면 여기 있지 않겠지.

그래서 나도 그런 까닭을 하나 더 슬그머니 얹어 본다.

--

내가 생각하는 형태 중 하나;

세상 모든 것, 대가 없이 어떤 바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루 또 하루 복잡한 일들을 처리하며
소소한 오늘처럼 내일을 맞이한다.
문득 생각해보면, 그 많은 대소사들이
어느새 넌지시 돈과 관계 맺지 않은 것 드믈다.

모른다 한들,
일을 열심히 하든 대강 대강 떼우든,
그 어떤 형태이든,
결국 스스로의 또 하루 목숨을 바치며 태우며 살고 있다.

소중한 목숨.
달리 어쩌겠어.
이런 순간, 이런 세상에 정신차려보니 놓여있는걸.

그러니.

그런 소중한 목숨 바치는데 쉽사리 지겨워지지 말라고
너와 나, 대소사의 틈바구니에서 잊혀진 빈 틈을 찾는다.
그런 빈 틈을 이미 존재하는 일상의 것들로 채워 나간다.

혹, 그러면 혹시라도
너와 나, 그 바쁜 와중에도
슬그머니 찾아오는 그 허한 공허함
채워주려나 싶어서.

--

혹, 이미 충분하여, 혹은 익숙함으로,
이 맘이 무슨 맘인지 알 필요 없는자.

그저 다행이라 여기고 깜냥 껏,
그렇게 어제처럼 오늘 내일을 살아간다.

조명이 될래요?

빛.

아둥바둥 세상에서 빛나려 할 때, 그 빛.
이 세상 형 형 색 색, 빛깔을 밝히고자 하는건지.
이 세상 시 리 도 록, 시꺼먼 세상 그저 시허옇게 덮고 싶은건지.

눈이 시리다.

세상에 빛이 너무 많다.
어둠, 그 용기와 지혜에 박수를.

어두움, 밝음, 어둠, 빛, 어둠.

니나.나나.니나노.

밝히긴 밝혔는데,
좀 너무 소란스러운게
귀가 따갑네 이제.


세상이 시허옇다.

혀와 몸.

너와 나의

욕심과 무지.
어설픈 기교.
섣부른 판단.
부족한 용기.

눈이 먼 지식. 가면. 쓰레기. 성장.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먹고
좋으면 좋아하고
싫으면 싫어하고
간단한건데
대가리 굴리던게 일이라
쓸데 없이 데구르르 굴러간다.

틀에 박힌 밥만 먹고
틀에 박힌 짓만 하더니
틀이 없으면 흐믈흐믈하구나.

그래 그걸 빛이라 여기고 죽 살아가면 되겠다.
뭐가 되도 뭐가 될거야.

한때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고 말하는 누군가를 보며
정말 그러면 좋겠다 싶었다.

다만
혀로는 그렇게 살아간다해도
몸짓이 영 따라주질 않는구나.
보기가 부끄러워서
그런척 봐주기가 토나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저 보지 않아야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내 안의 그림자를 찾느라 이것 저것 뒤적이던 사이
누군가의 그림자 안에서 나의 구멍을 느끼게 되었다.

입 밖에 두지 말고
몸 안에 두어야지.

혀 놀릴틈에
몸을 좀 놀려줘야지.

그래야

어떻게 살아도 결국 원하듯 사는 거니까

explicit - implicit

이게 무엇이고 저게 무엇이다 구분짓고 정의내리며
분명하고 명쾌한 무언가를 원하는 이들의 태도를 볼때
흔히 느끼게 되는건
정작 솔직하지 않은 무언가 그 터놓지 못하는
그들의 조심스러움이다.

뭔가 묘한듯 홀린듯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채
그 안에 품은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이들의 태도를 볼때
흔히 느끼게 되는건
그들 솔직한 열정과 바람에 휩싸인
그들의 모호한 한계.


어느 누구나 구멍이 있고
어느 누구나 빛이 있겠지.


누군가의 어둠을 보며 그의 빛이 그래서 밝구나 느끼게되고
누군가의 빛을 보며 그 뒤에 가리워진 어둠을 짐작케 한다.


한때 세상은 참 공평치 못하다 생각했었는데
공평하다는 것이 무언지 다시 생각이 들곤하더니
요즘은 또 세상이 참 공평할 수 밖에 없다.


뭔가를 분명히 하려 할때 그들의 태도에서
정작 솔직할 수 없을 수 밖에 없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
솔직한 그들 맘 다 쏟아 뭔가를 지저귀는 그들의 태도에서
정작 그 무언가 모호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또한 공감이 간다.


빛과 그림자 안과 밖.
둘 다 동시에 가지려다보니 참 곤란하겠다.
속도 많이 상하겠다.


어두우려면 씨꺼미 어두워야겠고
밝으려면 시리도록 밝아야겠지.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채
니 맘 내 맘 다 잡으려다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밝은듯 아닌듯 어두운듯 그런듯
침침하고 멍한 흐리멍텅 맥이 풀린


별 맛 없는 그것이 되어버리는 것.


너와 나의 무지와 욕심.

혹시.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랬다.

사람은 변하기 힘든가보다.
드러움에 힘이 빠졌고,
그 드러움에 힘이 솟았다.
천연덕스레 모르겠다는 말에, 그렇구나.
그래, 확신 또한 생겼다.

그렇구나. 
그렇게 생겨먹었구나.
아닌척 하는거라면 그게 너의 한계일거야.
정말 모르겠다면 그게 너의 숨겨진 본성인거야.

그냥 그런거.

인연이 결과적이라니.
지금 문득 드는 생각은 
그 과정, 그 순간이 그 인연인가봐.

한데 얽혀,
드러움 아쉬움 그저 넉넉함으로.
그런거 저런거 차라리 예뻐보이는. 
그냥 스쳐지나치는 바람처럼.
모든게 그냥 사랑.
그냥 사랑이길.

아 그래도 이 사랑.
지금 너는 너무 드러운걸.

400 words; 우스운 미래

당연시 되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

왜 그것은 그리 당연한 것이 되었나?

우리 삶을 둘러싼 당연함 속에서
나의 호기심은 -나로 인해, 남으로 인해- 어떤 일을 겪나? 

정상, 비정상?
그것을 판단케 하는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고,
기준이 있다면 그 역치는 어디즈음이며, 

어디로부터 왜, 어떤 절차로 형성되었나?

뚜렷한 목표, 확실함, 이성적 논리 따위로 점철되는 우뚝 선 사회 속에서
무심코 마주하게 되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때론 시시하기까지 한,
다소 서툴고, 덜 정제된 다분히 개인적인 가치, 기준의 사회적 발현은
정말 생각만큼 불안하고 공허한 헛된 것일까.

다양성과 다채로움, 이해와 공감.
힘주어 외치며 주장하던 꼴안에서 
정작 스스로 눈이 먼건 아닐까.

프로페셔널리스트로서 살아가는 우리.
그 전문화된 조직적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 나의 동시대인들에게
아마추어보다 더 못한 유아적 발상은 개인의 삶과 사회에 
과연 어떤 가능성과 미래를 가져올까?

우스운 미래라면 지금처럼 우습겠고,
혹, 그렇지 않다면 지금보다 웃을 수 있겠지.

/

파생되는 practice;

1. Stopped Questions. 
2. 나는 이걸 이거라 불러요. 
3. EXTRA SIGNAL by Som Ebody (익스트라시그널, Som Ebody 작품집)
    • Drawings overlooked
    • Sculptures abandoned
    • Installations dumped
    • Performance bychance
    • Commercials bycatch

    생각을 글로 옮길때.

    뭔가를 다듬으며 더 정확한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깎여나간 그 원석들 속에 미묘히 변하는 뭔가를 잃게 된다면.
    그럴 일 없을까.

    생각을 글로 정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놓는,
    그 중 나의 맘을 두드리는 글들을 볼때마다.
    내면, 깊이, 태도, 지혜, 희생.
    빽빽한 글 사이 스며나오는 그의 내면,
    그의 진심과 경험에서 나오는 깊이,
    설득을 위해 짓누르지 않는 사려깊은 태도,
    의미를 위해 때론 빙둘러 돌아갈 줄 아는 지혜,
    심지어 모순된 모습으로 대상의 반성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희생,
    모든게 휘휘 저어져 의도따위 떠벌림 없이
    소소히 시나브로 저절로 전해지는 무언가.

    그 맘에 도달하기까지의 나의 여정에,
    또 그 글을 써나가던 그 분의 여정을 떠올리며,
    내 맘이 하아...베시시 설레어진다.

    누군가는 알듯 모를듯 지극히 그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나를 움직이고.
    누군가는 어려운듯 지적인듯 흔히 말하는 객관적이라는 글로 나를 이해시킨다.

    결국 모두 출발할 때의 맘은 달랐지만,
    그 결과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을 보며
    무엇이 옳은 길인지에 대해 고민하던 이십대의 혈기가 생각이 났다.

    무엇이 효과적일까를 고민하던 즈음
    내 맘도 내가 잘 모르는구나 싶어
    어느새 내 맘이 궁금해졌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평범한 사람임을 알게 되며 반가운 것은,
    더이상 누군지 모를 누군가를 생각하며
    나의 작은 머리를 떼구르르 한없이 굴려보지 않아도 되겠거니.

    파고 파고 또 파도 알 길 없는 누군가의 맘을 들여다 보느라
    내 맘은 여기 저기 거미줄이 앉았다.

    그럴일 없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거니 싶어서.




    19 /  May / 2011.

    환상 속에서 해선 안 될 것들.

    깨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칠 필요가 없다.
    이게 꿈인걸 아는 순간이면 충분하지 싶다.
    억지로 깨어났다고 깬건지 꾼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해선 안 될 것을 맘 속에 새겨둔다.


    깨어나기 위해 누워서 발버둥 치지 않는다.
    깼다고 잠들지 않으려 몸서리 치지 않는다.
    깼다고 꿈꾸지 않으려 억지 부리지 않는다.
    꿈이었음을 알더라도 부끄러움에 꿈 속으로 숨지 않는다.
    꿈이 품은 꿈을 알아채면 된다.


    모든게 


    애초 맘편히 있어보려는 맘이었음을 잊지 않는다.


    뭔가 불편하다면 
    이게 대체 뭘 위한 짓인지 
    대체 무엇이 시작이었는지 기억해낸다.


    꿈 속이 더 불편하다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충분히 변죽을 울려본다.


    불편한 안정 속에서 그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챈다.


    싫으면 싫은거다.
    좋으면 좋은거다.
    좋다고 생각해봐야 좋다면 그게 무얼까.
    싫다고 여겨져 싫다면 대체 그게 왜일까.


    보일때 봐야한다.
    보려고 보지말고.
    보려고 기를 써봐야
    애꿎음에 눈이 먼다.


    척하며 덮으려다

    결국 난장판을 만들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시작이었는지 기억해낸다.
    기억이 맞는지는 어렴풋한 느낌일

    환상 속에서 해야 할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갈망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 버젓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보면 


    어렴풋이.
    스쳐지나가는 느낌.
    그 덕분.


    그 기분에.
    뭐라 말하려다.
    뭐 말하다.


    그리 뭐라 말하다보면,
    석연치 않은 그런.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차라리, 
    차라리 그러므로.
    비록 알진 못해도. 
    그러리라. 
    그러므로 그러리라.


    지속되는. 
    무언가.
    스며든 기분.


    끊임없는 연쇄의 끈.
    끊으려 하기보단 그러려니.
    그 속 격정적 순간.
    가만히 기다려 본다.
    한번에 터지기 보다.
    언제 그랬냐며. 


    어느새.
    젖어든 그런 마음. 


    격정과. 
    격정에 대한 걱정.
    걱정에 대한 격정.

    어느새.

    장황히 설명할 필요없이, 그것은 이런 듯 보인다.

    평범한 일상에 뭔가 나타나길 기다리지만 그게 무언지 알길없는 하루 하루.
    하루 하루 지나치는 이 길에서 뭔가 새로운걸 꿈꾸지만 그게 뭔지 손에 잡히지 않는 평범한 일상.
    그러나 이 마법같은 주문의 하루(Seeding)를 보내고 나면, 그래서 그 흐름 속에서 하루 하루(Fermentation)를 보내다보면 스믈스믈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이것 저것들. 결국 소박한 일상에서 소탈한 미를 하나 하나 주워가며 특별함이 과연 무엇인지-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지-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다.

    일상의 대변혁 없이도, 폭풍같은 격정이나 혁명따위의 거창함 없이도, 개인의 삶은 충분히 다채롭고 신기할수도 있는지-소위말하는 의미 따위가 있는지-조용한 태도로 씨앗을 심는다. 결과를 알 수 없음에 끝없이 묻고 찾게 되는 행위의 연속. 해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닌 행위의 과정 자체가 목적인 의도. 의도가 숨은, 행위로의 유도 속에 숨은 목적이 있다. 그야말로 '내가 모르는 앎' 속에 스스로를 위치하게 한다. 대상은 그렇게 빠져든다. 그리고 언젠가 무심코 '아!' 한다. 그것은 이 기나긴 과정의 원형적인 의도의 알아차림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바라본 어떤 대상에 무언가를 느낀 상태의 표현의 외마디이거나.

    목적을 위한 행위가 역설적인 결과를 낳지 않도록 영광스런 의도의 발설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느긋함으로 때를 기다린다. 안달스런 평가를 삼가한다. 지양해야 할 것은 이미 있다고 여겨지는 법칙이나 방법, 그걸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권위에의 집착과 투항, 환상. 지향해야 할 것은 역설적 결론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이 의도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의도는 앞으로 일어날 행위의 연쇄반응 안에서만 그 의미가 살아있음을 이해하는것. 즉, 자위에 기만당하지 않는것. 알량한 자위적 해석이나 근거의 허울에 빠지지 않도록. 무조건이 조건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모토임을. 아닌것은 아님을 느끼는 것.

    결국 그것은 끝이 없는 행위 속에 놓여있을 때 역설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나아갈 수 있음을 느낀다. 시작이 시작을 부르는 고이지 않는 흐름 속에서 그것의 진정한 의도는 퇴색되지 않으리라 현재 나는 상상한다.

    $2.50 - Take it for granted.

    위대한 힘.

    소탈함, 솔직함에 매료되지 않고 그냥 그 스스로 그렇게 되었을 즈음 봇물터지듯 보이기 시작하는 소소함의 전율.

    인위적 강압에 의한 모든 행위는 뜻하지 않는 반발심을 일으킨다. 그것이 의도일 경우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대게 그저 짧은 인생의 급한 욕망에 의한 결과였음을 그냥 알고 말게 된다. 실망할 것은 없다. 반발심은 결국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던 숨은 욕망이고 힘이었으니. 그렇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내가 그러한 힘, 의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고 있더라도 그렇게 행동할 용기가 있는 것인지. 

    멍청함을 보면 나는 지혜롭다. 
    몰상식을 대면할 때 나는 교양인이다. 
    아첨을 보면 나는 부끄럼을 안다. 
    교만을 보면 나는 겸손하다. 
    비열함에 나는 정의를 본다.
    치사한 속물을 바라보며 나는 느낀다. 

    ...

    그렇다면 거꾸로는 어떠한가.

    내가 멍청할때 누군가는 나를 보며 그 스스로 지혜로움을 바라본다.
    내가 몰상식한 행동을 할 때 누군가는 나를 보며 그 스스로 교양을 생각한다.
    내가 아첨을 떠는 동안 누군가는 그 부끄러움에 나는 그렇지 않다며 혹은 않아야겠다며 당당함을 바라본다.
    나의 치사함에 그는 혀를 차며 인간이 그따위일까 생각하며 그 스스로를 다잡는다.

    ...

    목적이 무언가를 누군가의 심정에 진심으로 느껴지도록 하기 위함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허나 이런 반발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의 굴욕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단호함이 있어야한다. 어쩌면 뻔뻔함일 수도 있고.
    그러나 삶은 어떻게 살았는가, 어떤 상태로 죽었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세상에서 진실로 그 의도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상태에서 저런 자살행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인지. 그 스스로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심히 알고, 그 비루함을 견뎌낼 뚝심과 내면이 있고, 동시에 그 행위에 취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그 행위를 즐기려 노력하지 않고 그저 무심할 수 있는 담담하고 소탈한 유쾌한 사람 몇 있을까. 이는 실험이라고 할 수 밖에 없겠다. 이것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인물이 형성되는 이유인가. 예술이라 표현 할 수 있는 영역을 누군가는 글로, 행위로, 삶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런 힘을 충분히 이해하고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있을까. 실재함을 대면하는 것은 단순하고 무식하리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가상의 한계는 결국 그 틀을 전제하고 그 스스로 취해있을 때만 성립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모른척하려해도 틀이 보이는 상황만큼 우스꽝스러운 것이 없다. 아무튼 늘상 말만 그럴듯이 뻔한 이야기 뻔하게 해대는 상대의 지리함에 힘을 얻어버리는 내가 또다른 속물인가 싶은. 위대한 힘이다.

    fermentation - anonymous, $2.50

    '무엇이 예술인가.'


    '우리는 예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받아들이는가?' 라는 오랜 인식의 틀에서
    '과연 무엇이 예술인가?' 라는 가려진 의문에 또한 눈길을 주곤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시원치가 않다. 결국 그것은 또다른 규칙과 권위를
    만들기 위한 수작. 따위에 생명을 빼았기어 아까운 하루하루 웅장한 헛소리를 양산한다.


    예술을 위한 절차.


    예술을 위한 규칙과 관문은 갈수록 낮아지는듯한 뒤태로 높아져가는 문턱을 능글히 가린다.
    규범화, 규칙화, 규율화 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마저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미의 소박하고 솔직한 스스로의 단서조차도 떳떳히 받아들이기 힘든 불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예술인가?' 라는 말은 그 안에 자조적이지만 이미 어떤 가능성을 숨기고 있다. 하루하루 꼬박꼬박 살며 '네가 스쳐지나간 그것. 우연히 발에 차인 그것. 버려진 그것. 한때 소중한 그것. 소중한 것, 모든것, 어떤것' 일 수 있는 그것. 그것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 그것. 째깍째깍. 규칙의 일련속에서 우연히 그 틀의 존재와 틈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그것. 삶의 시간을 들여 그것을 줍는 그것. 그것이 이끄는 그것. 씨앗이 되는 그것.


    그것이 예술의, '규범화 할 수 없는' , '규칙 저 너머 깊은 곳에 심성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 그 무언가가 내 삶 속에 녹아 쌓이고 있었음을 느끼고 스스호 떳떳히 해주는 역할. 커밍아웃은 어느새 그렇게 시나브로 이루어진다고 나는 느낀다. 


    이것은 일상을 좀 더 야릇한 곳으로, 내일이 기대되는 곳으로 모두의 커밍아웃을 유도한다.


    결국 이것은 먼 시간 지나면 아마도 fermentation의 서막이었음을 알게 되겠지.


    소탈함, 솔직함에 매료되지 않고 그냥 그 스스로 그렇게 되었을 즈음 봇물터지듯 보이기 시작하는 소소함의 전율.

    fetish

    mundane treasure.
    everyday fetish.


    object + * = ! fetish


    everything is somebody's something.
    주먹구구 셈법은 얼마나 믿어야 하나 
    카푸친 씨는 고성능 컴퓨터와 같은 계산능력을 가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아니다. 그런 카푸친 씨가 정글경제를 살아가는 데 휴리스틱은 매우 유용한 의사결정 방식일 수 있다. 정글경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젤 무리는 사자의 기척만 느껴도 이리저리 따져보지 않고 일단 뛰고 본다. 차분하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겨를이 없다. 직관과 주먹구구로 신속한 판단을 내리는 휴리스틱은 인간의 중요한 생존본능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휴리스틱은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 주먹구구의 한계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카푸친 씨는 자신의 주먹구구 셈법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과신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하루하루 보이는 만큼, 들리는 만큼. 
    그렇다면 
    생각이 많아 틀 속에 콕 갇히던지, 
    생각없어 틀조차 못느끼던지.
    결국 저도 모르게 죽어가나보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그 무언가 그림자를 바라보고.
    경우에 따라 스스로 그 맹신 정도에 따라
    뜻없는 말을 자신있게 하나보다.
    힘들다 힘들어.

    이제 말을 아끼고 행동을 보일때.
    다만 얄팍알량한 자신만이 유일한 기준 아니기를.
    목적을 위해 큰 맘 쓰기를.

    상상해본다. 
    낯선 외계행성에서 
    가능성 알길 없는 인류를 찾아 나설지.
    아님 오늘 하루라도 그들 언어를 익힐지.
    딱 그정도가 나의 지금 틀인가싶다.
    틀인가싶은거보니 아닌가보다.

    사람이 그리운건지 대화가 그리운건지
    때론 그렇고 때론 저렇다.
    차라리 말이라도 하는게.
    차라리 틀에 박힌 말이라도.

    발아.

    씨앗이라 말씀 드렸다.
    쭉 듣던 그 분이 내 입을 통해 입을 여신다.
    아냐 씨앗이라기보단 바이러스다.


    그래 난 지금 침투작전을 준비중인
    침투조 비밀요원이다.

    이렇게 느린 속도로 허나 쥐도 새도 모르게
    뭉근한 침투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씨앗을 심던 내가
    이제 바이러스 침투를 진두지휘하려 한다.


    뭔일인지 보이는 것만 보이고
    들리는 것만 들린다 불평했었다.
    차라리 눈먼 벙어리라면 했었다.


    침투를 생각하니
    그리 보이는 것 불행하지만은 않다.
    그리 조잘대던 그 잡소리 거슬리지만은 않다.
    그게 다 내가 이리 이리 흐르도록 한 비료겠지. 똥비료.


    이제 난 바이러스를 품은 보균자.


    다행이다. 하마터면 놓아버릴뻔 했어.


    모든 인연과 우연에 이토록 맘 담아 감사한 적 드물었는데.
    그 분은 학교도 일도 쓰잘데기 필요없다 하셨지만
    결국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만나게 되는 싹이었음 느낀다.


    너무나 극단적이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너무나 무서운 미래지만 너무도 당장 신이나는.

    맘에 심은 씨앗이 오늘 예기치 않게 발아했다.


    징소리가
    은은하게 한번
    강하게 또 한번
    출동. 
    손수 징을 쳐 알리셨다.

    추운 겨울 우이동 낡은 폐가
    도란도란 재미나게 낄낄낄 맘을 비웠다
    맥심커피 귤까먹고 호두 유과 노나먹었다
    쥐도 새도 아무도 모르게 
    내 맘 두터운 껍질이 샬샬샬 녹았다.

    대체 얼마만이냐.
    대체 왜 이제서야.

    뜨겁다. 
    따듯하다.

    /


    게릴라와 같은 시작은 일단 포석이 되겠다.
    반복이 주는 힘으로 천진난만한 상태가 되겠다.
    뜻이 있으므로 반복을 택하겠다.
    1년은 그렇게 세균전의 시발이 되겠다.

    기호라 생각이 든다면.

    내가 낯선 도시에서 그들의 행위 - 그들 스스로에겐 익숙한 행위 - 그 자체를 지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학습의 정도 차이 때문이다. 대상이나 상황의 자극(혹은 시그널, 기호)가 전달 되었을때 그 사회적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혹은 그 사회 구성원의 도움없이는, 나 스스로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그것을 해독해야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대중은 오롯이 어제와 같은 삶을 내일도 누리기 위해서, 어제의 삶보다 너무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발전, 그 흔들리지 않는 현실을 위해 적응과 사회화는 대중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수많은 시그널과 사회 구성원으로서(혹은 구성원으로써) 처리해야할 정보와 임무가 매일 대중에게 전달된다.
    그런 와중 잠시 어제와 다른 형태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절대적인 시간을 요하는 과정으로, 그의 피로를 유발하는 위험한 행위가 된다. 

    본능적으로 도전은 꽉 짜여진 현실안에서 그 현실을 더욱 공고히 하지 않는다면 피하게 마련이다. 대중에게 도전이란 이 현실을 더욱 더 굳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할 뿐, 이 현실의 그 이면, 다른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 현실을 달리 보라 강요한다면 그것은 무자비한 독재와 오만으로 인식될 뿐이다. 보다 온건하고 장기적인 자극으로 그 변화를 스스로 일으켰다 여기도록 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이 심한 요즘의 대중을 진심으로 도전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산재해 있는,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익숙해 그 자극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처리 되고 있는 소재를 파악한다. 그 소재가 지닌 사회적 의미 속에 정서적인, 개인적인 의미를 심는다. 그리고 한번의 강한 충격 - 추억 - 을 가한다. 세월이 흐른다. 일상 속에서 그 소재에 드믄 드믄 노출이 되며 강한 충격은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질 즈음 그 스스로는 그 소재에 대한 개인적 의미와 시각을 갖게 됨다. 이제 사회적인 의미의 기호는 좀 더 틈을 지닌 시그널을 더하게 된다.

    일상을 이제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957&category_type=series

    그러니까 내말은.

    어.
    그러니깐.
    니 무어냐고.
    연기력이 날로 늘어가.

    사파리 한판 더?

    사파리투어.

    있잖아 내 친구 얘긴데,


    하며 운을 띄우면 나도 솔깃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어느새 그런 얘긴 듣기 싫어져 버린다.
    듣기 싫어졌다기보단...


    솔깃하지만 듣기 싫은 얘기.


    결국 이 나와의 대화를 위해 너와 나 함께 나누는 이 시간에
    누군가의 삶을 시시덕, 혹은 - 때론 분위기상 - 진지하게 끄집어다
    썩썩 썰어먹는다.


    자기 얘긴 아니지만 친구 얘기라는 그 얘기.
    어쩐지 기쁘다면 웃어주면 되고
    다행히 안됐다면 얼굴을 굳히면 된다.


    달라지는 현실없이


    그냥 그렇게 또
    또 그렇게 나를
    나의 위치를 내 모습을 또 다시
    확인한다.


    사냥하는 사냥꾼들.


    내 얘기, 내 삶도 언젠가 너와 너의 누군가와 함께
    500짜리 맥주로 꿀떡꿀떡 넘어가겠구나.
    혹, 그 얘기가 너의 멋진 의미에 아름다운 근거를 주겠구나.
    난 이렇게 멋진 얘기를 낚아 올랐다며


    그 의미도 모른채 
    느끼지 못한 그 삶을 대가리로 
    망설임없이 써나간다.


    듣다보면 내가 싫어진다. 말하다보니 할 말이 없다.


    화자가 바라보는 세상에 화자는 없다. 
    세상을 낚느라 정작 내가 누군지 잊었다.
    뭔가를 말하는 의미심장함에 텅빈 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정신이 없다. 낚아 올리느라. 기록하고 기억하느라.
    이 순간을, 이 장면을 담느라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 틈이 없다.
    그냥 뭐 멋지느라 바쁘다.


    이렇게 나의 일상은 또 어디선가 짜여진 틀로 창작되어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를 위로하겠지.


    사냥하는 사냥꾼.


    있잖아 내 친구 얘긴데,
    하며 운을 띄우면 나도 솔깃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만다.


    차라리 사파리를 하지 그래.


    철갑을 두른 사파리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본다.
    호소력 깊은 눈빛 연기로, 그 쓸데없이 예리한 눈으로 바라본 타인의 삶.
    니 삶, 어디 여행기나 적다 끝날라.


    투어리스트.

    본질과 목적. 수단과 욕망.

    신비로운 몇가지.

    그 목적이 무언지에 따라 본질을 선택하는 경우.
    이기적 욕망으로, 본능적인 자기방어.
    그래서 알든 모르든 스스로를 기만할 경우.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 나머지 의미를 잃을 경우.
    스스로의 오류에 대해 생각을 잃을 경우.

    흔히 목적은 그럴듯하며, 행위는 사라진다.
    본질은 선택이 되어 훌훌 날린다.
    기회주의는 자라난다. 자각하지 못한채 싹이 튼다.
    돌이켜 보면.

    생각이 생각으로 그친다면 항상 기회주의와 위선의 틈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는건지도 모르겠다.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쉽겠지만. 그리 쉽지 않으니. 단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그 목적을 위한 최선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위선을 떨쳐버리기 위해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잡기 위해 큰 목적은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것. 그것에 그야말로 의미를 두고 끝을 맞이한다. 어디서 흘러들어온지 알 길 없는 그럴듯한 의미로 감싼다. 이렇게 본질은 가려지고 희한한 논리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목적은 수단으로 지워진다. 찾아가는 길이었다 말한다. 깊은 속 알길 없는 너와 나의 욕망으로. 뜨끔 뜨끔 뭔가 알겠다 싶을 땐 이미 늦었다. 이미 굳어진 이미지에 실은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말한다면 그 삶이 뭐가 되겠어. 그냥 그렇게 살다 가면 되겠다 싶은 맘으로. 욕망에 의해 지워진 목적은 본질이 슬쩍 뒤바뀐채 저잣거리에서 우상이 되어 나뒹군다.

    행동은 온데 간데 없고, 말들이 날뛴다.
    행동이 설령 온다한들, 그 목적은 본질이 아닌 자기 만족일 뿐.
    부여잡은 행동은 그 목적이 본질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다만 스스로 알 길 있다면.
    근데 그게 불가능한게, 알았다면 그렇지 않겠지.
    단지 존재는 타인의 시선에 구속되어 발을 동동 구르니.

    행위없는 공허한 말들이나.
    본질잃은 알량한 행위들이나.
    정도의 차이. 그냥 다 그랬구나.
    부끄럽게 얼굴이 타오르는 밤.
    폼나게 색안경을 끼고 밤길 어둡다 칭얼거린다.

    내일은 또 누굴 만나 씨앗을 뿌리나.
    주렁주렁 달린 탐스런 거짓부렁.
    뻥치시네 소리에 놀라 움찔 보니
    코에 난 구멍에 손을 후벼박고 꼬맹이가
    내쪽으로 온다.
    싶더니 휙 지나쳐 저리 간다.

    드러워죽겠어.
    엄만 너도 저랬다며
    키워봐야 저 맘 안다 했다.